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직봉전쟁 (문단 편집) == 결과 == 한편 남방에서 직계에 호응하려 했던 [[쑨원]]의 [[중국 국민당]]은 1922년 6월 16일 [[천중밍]]이 일으킨 [[영풍함 사건]] 때문에 붕괴, 쑨원이 상하이로 도주하는 등 위기를 겪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사천의 [[양썬]], 광동의 [[천중밍]]이 우페이푸에게 복종하면서 직계는 관외를 제외한 중국 천하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. 직계는 내친 김에 그간 마음에 들지 않던 대총통 [[쉬스창]]까지 끌어내기로 결정, 구국회와 약법을 부활시키면서 쉬스창을 선출한 안복국회의 정통성을 부정하였고 2대 대총통 [[리위안훙]]을 총통으로 추대했다. 여기에 1923년에 리위안훙까지 끌어낼고 [[회선 사건]]을 일으켜 [[차오쿤]]을 6대 대총통으로 선출하였다. 하지만 군공을 세운 펑위샹 등이 논공행상에서 배제되면서 큰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장쭤린은 자신의 부채에 '무망오치' 네 글자를 새겨놓은 후 7월 24일 동삼성 육군 정리처를 설치, 대대적인 군 현대화에 착수하여 와신상담하고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